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먼드 2세 (문단 편집) == 생애 == [[애설레드 2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엘프기프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원래는 왕위 계승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으나 그의 두 형인 애델스탄[* 에드먼드 2세와 마찬가지로 용맹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에드먼드 2세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과 에그베르트가 요절[* 애델스탄은 1014년, 에그베르트는 1005년에 사망했다.]하면서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됐다. 애설레드 2세는 나중에 노르망디의 엠마와 재혼했는데, 이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참회왕 에드워드]]로서 에드먼드 2세와 배다른 형제가 된다. 아버지 애설레드 2세와는 다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새어머니인 노르망디의 엠마가 자신의 어린 아들들을 왕위 계승자로 만들려 했고, 이것이 그에게 큰 위협이 됐기 때문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 동생이 차기 왕이 되면 장성한 이복형들의 안위는 매우 위태로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부왕 애설레드 2세가 엘프기프와 자신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홀대한 것 역시 불화의 원인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애설레드 2세가 망명길에 올랐을 때 엘프기프와 자신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전부 다 잉글랜드에 남기고, 노르망디의 엠마와 자신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과 함께 피신할 정도였다.] 이러던 중 1015년에 애설레드 2세가 데인로 지역의 실력자인 지거페르트를 처형하고, 지거페르트의 아내였던 에알드기드를 수도원에 감금하자 에드먼드가 에알드기드와 결혼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부왕에게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행위였지만 복위 과정에서 귀족들과 다소 굴욕적인 조약을 맺을 정도로 권위가 실추된 늙은 왕은 이런 아들을 벌할 수 없었다. 이 결혼 사건은 애설레드 2세를 증오하던 데인로 지역 사람들과 에드먼드가 더 밀접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016년 4월 23일, 애설레드 2세가 죽었고, 런던의 시민들과 귀족들은 에드먼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그에게 모인 시민들과 함께 다섯 차례나 크누트 대왕의 군대와 싸웠으나, 10월 18일 벌어진 '''애선던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 에드먼드 2세는 크누트 대왕과 평화 협약을 맺어 그는 [[웨식스]]를, 크누트는 [[머시아]]와 [[노섬브리아]]를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한 달 반 조금 더 지난 11월 30일에 에드먼드 2세는 숨을 거두었고[* 사망 원인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아서 부상의 악화나 질병 등 여러 설이 있고, 그 중 암살설도 있는데 이 암살 방법이 걸작이다. 에드먼드 2세가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는데, 암살자가 변기 아래에 숨어 있다가 에드먼드 2세가 변기에 앉자 [[단검]]으로 엉덩이를 수 차례 찔러서 살해했다고.... 바리에이션으로 암살자가 엉덩이 밑에서 쏜 [[석궁]]에 맞아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 당시 성의 화장실은 해자 쪽으로 큰 구멍이 뚫려서 배설물을 해자에 버리는 형태였기 때문에 암살자가 숨어들기 쉬웠다. 그러나 이 암살설은 기록된 문헌이 별로 없어서 [[야사]]에 가까운 취급이다.] 크누트가 잉글랜드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덴마크인들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웠기에 '''잉글랜드 왕 중에서는 [[앨프리드 대왕]] 다음 가는 투사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별칭이 뜻하듯이 의지가 굳고, 리더십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심지어 적이었던 크누트 대왕조차 그의 왕릉에 찾아와 참배하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